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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손씨 대 장군인 광리군 춘향제를 모시고 집안의 뿌리 찾기에 동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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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6-05-04 19:18 조회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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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4일 용인뉴스 기사]
밀양손씨 대 장군인 광리군 춘향제를 모시고 집안의 뿌리 찾기에 동참하다
 
 
 
 
역사와 집안의 전통을 살려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admin_062649.png 손남호 2026-05-0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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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복재 핵심 간부들과 행사종료후 한컷 (영광스럽게도 손남호 회장이 초헌관을 맏았다)

밀양손씨 중앙종친회(회장 손남호)는 지난 5월 3일 밀양시 소재 광리군 사당인 춘복제와 현충사에서 새벽부터 행사중에도 내리는 우중에도 많은 전국의 종친 회장들과 종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광리군 긍훈의 시향이 손병기 운영위원장의 집행으로 거행되었으며, 손병돈 종회장. 손봉현, 손병윤, 손규, 밀양의 인사들이 참여하였고, 중앙종친회에서는 손남호 회장을 비롯하여 손교영 종사국장. 손영동 사무국장, 손석태 부화장등이 참석하였다. 

이번 춘복제행사는 중시조이신 광리군에 대한 업적을 기리고 그분이 후손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이 행사의 전통을 후손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각인하게만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광리군의 휘는 긍훈(兢訓)이시다. 긍훈 즉 손대장군께서는 고려 태조와 함께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훈공을 세워 보국숭록대부에 오르고, 광리군에 봉해져서 가세를 크게 일으킨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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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운이 기운 신라 말에 후백제 견훤 왕이 운문산에 지룡산성을 쌓고 기습부대를 만들어 신라 공격을 노리던 중이었다. 서기 927년에 지룡산성을 출발하여 간월산성의 신라군을 무찌르고, 신라군을 포위하여 신라 55대 경애왕과 왕비를 죽이고 후백제 견훤왕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허수아비로 왕위에 올려놓았다. 이에 손대장군은 송도 개성의 고려왕 왕건을 찾아가 후백제를 공격할 것을 간청하였다.

왕건이 손대 장군의 지휘 하에 15,000명의 기마병을 주어 후백제군 토벌에 나섰다. 손대장군은 당시 견훤 왕을 몰아내고 왕에 올라있던 견훤의 아들 신검을 생포하고 후백제군을 정복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고려가 마침내 통일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어 광리군에 봉해지고 정일품 보국숭록대부에 오르니 그 명성이 일세에 떨치게 되었으며, 사후 밀양 부북 교동춘복동에 장례하고 삼중대광사도에 추증하였다.

후세인이 손대장군의 공훈과 명성이 당대의 으뜸이었으나, 역사에 그 사적이 자세히 기록된 점이 없어 고을 사람들이 그 공덕을 추모하여 추화산정에 사당을 세워 관으로부터 수물을 갖추어 향사 하였다. 특히 광리군께서는 신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원광국사가 세운 대작갑사에서 화랑도의 근본인 세속오계를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전통적인 사상교육을 보위하는 데에도 앞장섰다는 점을 손병돈 종회장의 선인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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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남호 밀양 손씨 중앙종친회 회장은 인사말에 “전국에서 모인 종회장들에게 기록의 보존은 후손들이 해야 할 숙명이고 이를 빛내는 것은 현재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광리군의 기록뿐만이 아니라 문중에서 보관중인 기록물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하는 것이 숙명이므로 중앙종친회에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행정력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손 회장은 이어 간담회 중 “우리 집안의 유물 유산이 많이 있다, 그래서 중앙종친회에서는 종사연구회를 종사국장을 중심으로 7명의 위원을 임명하여 각 집안에서 보관중인 역사적인 기록물들을 찾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데 대표적인 사업으로 1700년대 제작한 족보를 보관중인 문중이 있어 기록물을 보강하고 고증을 거쳐 2026년도에는 추진해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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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마로부터 손순 시조 그리고 파의 분파를 기록으로 찾아본다. 시조 순(諱順)의 혈손(血孫) 7대손인 광리군 긍훈은 고려개국 공신으로 신라말 고려왕 왕건(高麗王 王建)을 찾아가 1만5천여명의 군졸을 이끌고 후백제를 쳐 황산군 (黃山郡 :지금의 連山郡)에서 후백제왕 신검 (後百濟王 神劍)을 생포하고 혁혁한 전과를 올려 고려 삼국통일을 이룩한 공훈으로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졌으나 사학자들과 드라마 편집자들이 특정인을 부각하는 바람에 이름이 새롭다.

그러나 손긍훈 손대장군은 정1품 보국숭록대부(正一品 輔國崇錄大夫)에 오르고 삼중대광 사도(三重大匡 司徒)에 추증되었으며 집안을 크게 부흥하였으며 광리군(휘 긍훈)는 밀성(密城 :당시는 광리) 남정촌(南亭村)에서 태어났으며, 추화산성(推火山城)에 거점을 두고 비적을 방어하여 많은 위훈을 남기는 등 왕의 칙명에 따라 지금도 장군의 영정(影幀)이 운문사 조영전에 봉안되어 해마다 음력 9월 9일에 향사 지내고 있다

아울러 밀양손씨 일부의 파에서는 광리군(휘 긍훈)을 중시조로 한 세계 계보로 삼고 있다. 후손들은 밀양, 경주를 중심으로 영 호남(嶺湖南)등지에서 진주, 창녕, 나주, 부안, 보성, 그리고 이외지역인 강릉, 춘천, 청주, 옥천, 밀양, 영동, 대구, 북청, 장연 등에 분포되어 대족(大族)을 이루어 세거하였으며 분파로 번창하는 등 고려와 조선조에서 성리학을 전공한 명문 세가로 번성하여 그 지역의 역사와 향토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9세 변(抃)은 고려 고종 때에 벼슬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수사공(守司空)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지냈으며. 13세 빈(贇)은 충숙왕 때 여진을 물리쳐 온성(穩城)에 라는 전승비가 세워졌고, 조적의 난을 평정하여 밀성군에 봉해졌다. 15세 밀성군 빈 할아버지의 손자 (4명) 있었는데 여기서 분파하는데 시점이라고 볼수 있다

장자 탁 (좌사부공파), 2자 하 (전농시사공파), 3자 티 (중서령공파), 4자 영 (군사공파)으로 분파되었으며 19세 ~ 20세손에 와서는 세거 지역에 따라 영동(부연공)파, 교동파, 장연공파, 북청공파로 분파되고, 관직 등용에 따라 목사공, 판서공, 진사공, 현감공, 판관공, 직장공, 생원공, 부사공 등 휘호에 따라 오곡공, 역승공등으로 파보의 입향조로 후손들이 파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25세에 이르러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가 건국되면서 더욱 파의 분류가 있었으며 10여개의 파에서 41개파로 확장되고 현재에 이르러 37세 손부터 더욱 분파를 하여 전국 각지에 새거지를 만들면서 160여개의 소 문중이 존재하고 있어 대동보와 파보를 만들어 조선조의 가계보를 보는 듯 하였으며 소 문중 중심의 족보도 존재하고 있다,

족보는 집안의 기록을 하는 것으로 역사성을 인정받고 왕조실록을 벗어난 역사서로 평가받는다는 점에서 우리 밀양손씨 족보는 기록면에서나 역사성을 인정받아 중앙종친회에서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족보에 대한 보존을 목사공파 담양문중에서 1700년대 제작한 무자보와 임술보등 족보 여러점을 보관하고 있어 역사성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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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강평 과정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보사에 항렬을 정하여 내려오고 있으나 파보별 다르게 정하는 경우가 있어 안타까운 일이 생각하며 같은 항렬을 쓰면 뿌리를 찾는데 큰 어려움 없으라 생각하지만 대부분 일가에서 보사에 관계없이 형제간 항렬만 쓰는 경우가 많아 몇 대손으로 구분을 해야 되는데 불편한 점이 나타나고 있는데 각 문중의 항렬자 부여를 이해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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