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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밀양손씨 목사공파 제학공 손비장 향사에 참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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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6-05-01 20:40 조회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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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1일 용인뉴스 기사]
부안 밀양손씨 목사공파 제학공 손비장 향사에 참여하다
 
 
 
 
밀양손씨 목사공파 최고의 인물 손비장 후손을 조명하다.
기록유산의 결정체 족보를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사업에 동참
admin_062649.png 장인자 2026-05-0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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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손씨 중앙종친회 회장 손남호는 지난 5월1일 일요일 (3월 15일.음)에 있었던 계경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제학공 손비장외 10명선조들에 대한 향사에 참여하였다. 계파종친회장 손한선의 주도로 실시한 이번 행사는 부안군 희덕제에서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초헌관에는 중앙종친회장 손남호, 아현관 목사공파 손중호회장, 종현관 진안 문중의 손종엽회장을 지정하고 계파 시조인 26세 계경공의 향사와 함께 6대 손자까지 합동으로 향사를 지내 제약공 손비장과 한림공등 선조들의 업적을 기렸다.

밀양손씨 중앙종친회 손남호회장은 향사에 참여한후 중원들과 간담회를 갖고 담양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족보가 기록유산에 등재할수도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진안문중의 조상에 대한 충효사상을 전파하는데 일조하였다는 미담과 각문중이 소장하고 있는 교지등 금속문에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선조들의 업적을 되돌아보면서 그분들이 무엇을 우리 후손들에게 가르쳤는지를 되새겨보는것이 좋다는 덕담을 전했다

조선중기의 가문을 빛낸 선조의 무공업적을 후세에 전하는 방법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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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공 손책의 셋쩨 아들 손계경은 천성이 효심과 형제의 우애가 깊고 장성하여서는 포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학문을 이수하고 조선초 백씨의 상소와 불굴의 저항으로 보성으로 귀향을 당하자 어머니 원주이씨를 봉양하고 거주를 하였으며 어머니 원주이씨가 돌아가시자 제례에 3년상을 지내고 둘째형 유경과 헤어져 전북 부안에 세거지를 옮겨 정착을 하였다.

이후 계경은 벼슬을 하지 않으면서 농사를 짓고 낙시를 하면서 후학양성에 주력하니 사람들이 처사공이라고 불렀다. 이후 후손들은 목사공 처사공파라고 입향조를 정하였다. (현재 목사공파에서는 보성에 삼경공이라 하여 3형제 묘를 만들어 향사를 지내고 있는데 유경의 묘는 실제이고 검경과 계경은 단으로 만들어져 있다(목사공 향사일 매년 10월 15일)

손계경의 후손들은 이 직위를 통해 지역 사회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유교 교육을 중시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이들은 유교적 가치관을 확산시키고, 국가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문학과 학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후손인 손비장과 동생 손상장은 시와 수필, 역사서 등의 저술을 통해 조선의 문화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손홍적, 손홍록. 손승경 등이 조선중기의 인물로 부안과 정읍지에 등록되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재되어 있다. 제학공 손비장 공(公)은 부제학 사간원 대사간 상호군(副提學司諫院大司諫上護軍)으로 조선조초기의 성리학의 대가로 휘(이름) 비장(比長)이며 목사공 손책의 현손(玄孫)으로 1464년(세조10년) 에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을 한다,

이때 서울에서 충남 온양에 세조가 피접을 와서 과거를 실시하였는데 당시 알성시(謁聖試)에서 등과하여 예문관 수찬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등과 15학사(學士)의 도상(圖像)에 들었고 서거정(徐居正)등과 동국통감을 찬진(撰進)하였다. 공조참의 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예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손비장은 관직에 있으면서 지금 전해 내려오는 단군 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기록을 총집합한 을 편찬하였는데 이는 성종 14년(1483)에 시작하여 성종 16년(1485)에 완성되었다. 즉 성종 14년 10월에 서거정이 여러 문신과 함께 연주시격(聯珠詩格)에 대한 주석을 붙이고 있던 중 경연 자리에서 공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연주시격의 주석과 함께 의 편찬을 청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1년 만인 성종 15년 (1484) 11월에 이를 완성하였는데, 이렇게 짧은 기간에 완성된 에 대하여 성종은 만족하지 않았는데, 특히 사론(史論)에 대하여 그러했다. 그에 수록된 사론은 모두 기성의 사론을 인용한 것들뿐이고, 편찬자가 새로 지은 사론은 한편도 없었다. 

그리하여 성종은의 개편을 명한 것 같으며, 성종 16년(1485) 7월 드디어 개편된 이 완성되어 이를 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지금 전하는 이다. 이 의 편찬자는 훈신계(勳臣系)의 서거정(徐居正)과, 사림계(士林系)의 표연말( 表沿沫) 그리고 손비장 (孫比長)등 10인이었다. 

이렇게 동국통감을 집필에 관여한 손비장(比長)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1464년( 세조10) 생원으로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1469년(예종 1) 예문관 수찬으로 있으면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및 을 편찬하였다. 성종 2년 1471년에는 그 공로로 이조정랑으로 승진되고 1475년 장령이 되어 여러차례 시무소( 時務疏)를 올렸다.

1476년 문과 중시에 갑과로 급제. 예문관 부제학 참찬이 되어 간언에 기꺼이 따를 것과 대간의 임기를 연장할 것 등의 내용으로 된 시무4조 (時務 四條)를 왕에게 건의하였다. 다음해 대사간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쳐, 행부호군( 行副護軍)이 되었다.1478년 승지로서 왕이 성균관에 행차할 때 예에 어긋났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6년후 1485년 서거정(徐居正)등과 함께 을 찬진(撰進). 이어 공조참의 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예문관 부제학에 이르렀다. 손비장은 과거제도가 출세를 하는 지름길이며 신분상승을 할수 있는 통로였으나. 과거제도가 정착되면서 왕족이나 그 척신, 권문세가의 자제들이 고위직을 세습 독점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부패의 온상인 낙하산 타고 내려오는 인사를 할 수 없게 되었고 민초들 중에서도 학식과 기량 등이 출중한 사람은 국정에 서용되게 되면서 ‘개천에서 용이 나는’ 세상이 된 것은 사실이다. 조선조에 들어 이 제도가 더욱 발전하여 ‘과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대과(大科: 文科와 武科)와 전단계로 자격고시 성격의 소과(小科: 生員, 進士)를 거쳐야 했다.

양반들은 이 제도로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열리게 되니 힘없는 서민들에게는 유일한 출세의 길이요 청운의 꿈이었다. 여기에 합격, 또는 급제하면 양반계층으로 까지 신분 상승이 될 뿐만 아니라 부귀와 영화가 함께 하였다. 이에 손책의 아들 계경이 벼슬에 뜻을 두지않고 초야에 묻혀 살면서 처사로 활동하였지만 가세가 기울자 신분 상승을 위한 벼슬길에 나선다

특히 대과인 문과에 급제하면 왕이 내리는 홍패(紅牌: 붉은 종이에 쓴 합격증서)를 받고 머리에 어사화(御史花)가 꽂아지며 왕이 내리는 어주삼배(御酒三盃)를 마시고 서울 거리를 삼일유가(三日遊街) 하였으며 금의환향(錦衣還鄕), 호호거리며 고향에 들어서면 마을 앞에는 붉은 칠을 한 긴 장대 위에 푸른 용을 앉힌 화주(華柱, 소줏대)를 세운다. 

이와 같은 과거 민속놀이는 소과에 합격하여도 같은 형태로 행해졌으니 이로 미루어보아 문과의 대소과(大小科)에 급제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이야 직업도 다양해서 어느 면에서라도 일가를 이루면 존경도 받고 경제적인 부도 누릴 수 있지만 조선조시대에 등과를 하는 사람들의 전통사회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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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같은 경우는 사농공상의 차별 속에서 직업군도 다양하지 못했으며 과거제도(科擧制度)가 거의 유일한 출세의 통로가 되었다. 김홍도의 풍속화 가운데 부모가 방 안에서 물레질과 돗자리를 짜는 일을 하고 있는데 방 한구석에서는 방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책을 보는 아들이 있다. 과거제도에 매달리는 당시 분위기를 반영하는 그림으로 평가한다.

비록 가난해도 과거에 합격만 하면 본인의 출세는 물론 집안도 살릴 수 있다는 분위기 속에서 과거에 매달린 당시의 사회상이다. 궁벽한 시골인 부안도 이런 과거제도의 흐름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계경의 현손이 비장과 상장은 사농공상의 차별 속에서 직업군도 다양하지 못했으며 과거제도(科擧制度)가 거의 유일한 출세의 통로가 되었다

이처럼 손비장등 10여명의 선조들은 출사를 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부서에 재직을 하면서 집안을 일으킨 분들이다. (부안군지의 인물 기록되었다.) 조선시대의 ‘인물(人物)’이라 함은 대체로 보통사람보다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을 이르는 말로 아무나 쉽게 해내지 못하는 일들을 해내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작게는 집안이나 종중(宗中)을 이끄는 인물도 있을 수 있고 고을이나 나라, 또는 세계를 이끌어가는 큰 인물도 있지만 그 인성이 넉넉하지 못하거나 행의(行誼)가 바르지 않은 사람은 인물이라 하지 않는다. 긴 세월 동안 우리 고을에서는 인물로 평가받는 분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그분들의 공덕(公德)은 고을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이에 대하여 1991년에 간행된 『부안군지(扶安郡誌)』 인물편(人物篇)을 보면 많은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대부분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부안고을 사람으로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거나 관직에 나아간 사람, 학덕(學德)이 높았던 명현(名賢), 그리고 국가에 충성을 바친 충신, 부모와 남편에 대한 효열(孝烈)이 장했던 분 등 다섯 가지를 그 범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과거 민속은 소과에 합격하여도 같은 형태로 행해졌으니 이로 미루어보아 문과의 대소과(大小科)에 급제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서는 전국에서 인재를 고르게 뽑아 쓰기 위하여 팔도의 크기와 인구의 과다에 따라 응시자의 정수를 균배하였으니 과거에 응시하는것도 지역에서 발탁을 우선시하였다.

예를 들면 서울과 경기지방은 200명, 충청과 전라도에는 각각 60명, 경상도는 100명의 정수가 문과를 뽑는 최종 복시(覆試)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으며 3년마다 간지(干支)의 자(子)·묘(卯)·오(午)·유(酉)자가 든 해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시행하므로 이를 식년시(式年試)라 하였다. 문과의 경우 최종 급제자 정수는 33명이며 장원 급제자를 필두로 성적순으로 발표하였다.

손비장과 손상장이후 손씨문중에서는 손홍적이 벼슬에 나간다, 손홍적은 중종 5년에 진사에 급제를 하고 중종 38년에 다시 문과에 급제를 하여 승문원 정자직에 임명되고 예문관 검열, 국제 한림에 제수되었으며 명종 원년에 대교겸 춘추관 기사관. 장사국직서로 승차하여 있을 때 장희빈의 오라버니 윤원형등이 공의 직필을 미워하였다,

명종 4년에 모함에 의하여 평안도 위안으로 귀향을 갔다가 그 이듬해 향년 40세로 서거하였다. (명종실록과 명종실기에 사적이 실려있다) 선조 3년에 문선공 이율곡의 주청으로 복권되어 부안 용정서원에 향사 되었다. 아들 손승경은 아버지가 귀향을 가는 것을 보고 정읍에 살면서 벼슬을 하지 않고 살았다. 이후 선조가 아버지 손홍적을 복권시킨다.

이때 선조는 자식도 역시 충신으로 보고 손승경에게 참봉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출사를 하지 않았으며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전주 경기전에 보관중이던 태조의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가솔 30명을 이끌고 종숙 손홍록과 안의등과 함께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 세계적인 유산을 보호한 역대급 인물로 정읍에서 초은공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후 고경명 의병장이 격문에 호응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출전하게 되면서 조선왕조실록 보존은 종숙 손홍록과 안이에게 맡기고 금산과 진안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하였으나 양성현(경기도 안성) 전투에 참가하여 조헌 의병장과 함께 장렬히 전사한다. 이후 후손들은 초은공으로 시향을 정읍 염수제에서 지내지만 아버지 손홍적은 부안 시제에 함께 지내고 있다.

목사공 손책 3자 손계경의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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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공 손책의 3子로 처사에 오른 26세 손계경의 후손들로 주로 전북 부안군과 정읍시 등에 산재하고 있으며, 전주와 진안, 익산. 임실, 순창등지에 후손들이 분파를 이루어 살고 있으며, 고창과 나주에도 살고 있다. 처사공파는 처사공의 28세 손자 곡성 현감 손민의 아들인 손비장과 손상장이 각각 예문관 부제학과 통례원상례 관직에 오르면서 계파가 또 달라진다,

큰아들 29세 손비장의 후손들은 정읍 중심으로 익산 전주, 익산 전주. 순창. 임실. 나주등에서 세거지를 두고 번성하였고 두 번째 아들 29세 손상장의 후손들은 묘소를 정읍에 두고 잇으나 고창으로 세거지를 옮기면서 고창 심원에 제각을 만들어 손상장을 파 입향조로 시향을 모시고 35대 이후의 후손들은 고창에서 빠져나와 담양, 장성, 광주, 전주, 순창등지에 살고 있다,

29세 손비장은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 30세 손세기는 부안군 내요리에 거주하였고 손세기의 아들 31세 손대로의 후손 중 손충겸이 김제로 세거를 정하여 김제 손씨들의 입향조가 되었으며, 34세 손경서는 진안의 입향조가 된다, 손세기의 차자 손중로 후손 중 손홍적의 아들 손승경은 정읍 북면 용호동에, 작은아들 손승제는 서천군 남면에 정착을 하였다.

그리고 2자인 손홍륜 아들 손오상은 고창군 상하면, 3자 손홍서의 자손들은 무안 석진, 보성 율어에 입향조를 두고 세거지를 형성한다. 손세기의 3자인 손숙로의 후손들은 정읍시, 칠보면 반곡리 일대에 거주하고 일부는 전남 영암, 임실 신평에 세거한다, 손비장의 2자 손세주는 전남 화순군 화순읍 주도리에 세거를 정하고 집성촌으로 최대 번성촌을 이끌고 있다.

비장의 동생 상장은 손세웅과 손세희등 형제를 두었으며, 정읍시 진산리 수령동(현재 정읍시 상교동에 세거하였다. 장자 손세웅은 한산 군수와 대사간을 역임하였고, 후손의 손건의 자손들은 금산군 제원면 일대에, 손감의 자손들은 정읍. 고부, 경북 영양에 세거지를 두고 있으며, 손간의 자손들은 고창군 심원, 아산 등지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26세 계경 후손들의 인물로는 27세 단성 현감 손의화, 28세 곡성현감 손민, 29세 홍문관 부제학 손비장, 통례원상례 손상장. 30세 한산군수 손세웅, 31세 충순위 손중로. 한림 손숙로 장례원 판결사 손계금, 32세 대교 손홍적. 진사 손홍륜. 진사 손홍계. 한계공 손홍록. 장악원정 손대남. 33세 초은 손승경, 호조참의 손우절, 34세 도총부도사 손호신등이 있다. 

계파의 효정신은 시조 손순으로부터 이어받아 39세 효자 손경엽 40세 효자 손철우가 대를 이어 효자의 교지를 받았으며, 금속문으로 정읍시에 효자비가 있다. 42세 손화중이 동학 지도자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글쓴이 : 밀양손씨 중앙종친회 손남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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