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손씨 중앙종친회 임원들. 족보의 우수성, 최선을 다해 보고대회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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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남호 | 2026-01-15 18:28 |

밀양손씨 중앙종친회 손남호 회장은 15일 서울시의회 별관에서 개최한 전국족보등재위원회가 주최한 보고대회에 손교영 종사국장, 손영채 유산등록 추진위원장등과 참석하여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록에 필요한 절차를 진행하였으며, 우리 손씨 문중이 소장하고 있는 족보의 우수성을 인정받도록 손교영 종사국장(사무총장)이 직접 보고하였다.
이날 전국의 유명 각 문파에서 자신들의 족보의 우수성을 알리고저 28개 문중에서 대표들이 참석하여 열띤 보고대회를 개최하여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고 우리 밀양손씨 중앙종친회에서는 밀양손씨의 태생과 시조, 중시조의 업적, 그리고 10여편에 이르는 족보 발행의 역사성을 강조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어 한국족보는 왜 탁월하고 독보적인가에 대해서 “우리의 독창적인 기록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인류의 보편적 유산으로 승격시키는 것은 물론 우리의 전통문화를 오늘에 되살릴수 있는 역사문화운동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교육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고 기록유산은 그미래의 뿌리라는 점을 우리는 자각을 해야하고 족보는 과거를 보존하는 사업이 아니며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것인가를 기록하는것이니 족보사업이나 수단작업에 우리모두 책임을 갖고 동참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어 손교영 사무총장(종사국장)은 보고문서에 밀양손씨의 유래에 대해서 손(孫)씨의 역사성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옛날 진한땅에 육촌(六村)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세번째 기록에 무산대수촌이 있고 촌장에는 구례마(俱禮馬)로 처음 이산(伊山)에 내려와 손씨의 원조가 된 것이다. 동국사략(東國史略)에서는 조선백성이 동해빈(東海濱)에 사는데 육촌으로 나뉘어 진한의 육부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육부가 알천(閼川)에 모여 상의하여 임금이 없어서 백성이 다 방종하고 무례하니 유덕한 사람을 군주로 선출키로 하고 박혁거세를 옹립하여 임금으로 모시고 서라벌에 도읍을 정하였다 했다. 이 때가 단기 2277년 (서기전 57년)이다.
그리고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신라유리왕 9년 단기 2365년(서기 32)에 육부명을 고쳐서 대수부(大樹部)를 모량부(牟梁部)로 하고 성씨를 손(孫)씨로 사성하였으며 휘 구례마(俱禮馬)의 시호(諡號)는 충렬군(忠烈君)이요, 후에 문의왕(文義王)에 추봉되었다. 신라 개국공신(開國功臣)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서기 1975년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이 경주 남산(南山)아래에 입덕묘(立德廟)를 세워서 육부촌장(六部村長)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8월23일을 기하여 향사(享祀)를 모시고 있으며, 성지화(聖地化) 되고 있다.

다음으로 손씨의 시조 손순(孫順; 고본古本에는 손순孫舜이라고 했다)은 모량리 사람이니 아버지는 학산이다.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양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였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항상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손순은 민망히 여겨 그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가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소. 그런데 아이가 어머님의 음식을 빼앗아 먹어서 어머님은 굶주림이 심하시니 이 아이를 땅에 묻어서 어머님 배를 부르게 해드려야 겠소." 이에 아이를 업고 취산 (이산은 모량리 서북쪽에 있다) 북쪽 들에 가서 땅을 파다가 이상한 석종을 얻었다. 부부는 놀라고 괴이히 여겨 잠깐 나무 위에 걸어 놓고 시험삼아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은은해서 들을 만하다.
아내가 말했다.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필경 이 아이의 복인 듯싶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남편도 이 말을 옳게 여겨 아이와 석종을 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종을 들보에 매달고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 소리를 듣고 좌우를 보고 말했다. "서쪽 들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도 멀리 들리는 것이 보통 종소리가 아니니 빨리 가서 조사해 보라." 왕의 사자가 그 집에 가서 조사해 보고 그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왕은 말했다.
"옛날 곽거가 아들을 땅에 묻자 하늘에서 금솥을 내렸더니, 이번에는 손순이 그 아이를 묻자 땅 속에서 석종이 솟아나왔으니 전세의 효도와 후세의 효도를 천지가 함께 보시는 것이로구나." 이에 집 한 채를 내리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어 순후한 효성을 숭상했다. 이에 손순은 예전에 살던 집을 희사해서 절로 삼아 홍효사라 하고 석종을 모셔 두었다. 진성왕 때에 후백제의 횡포한 도둑이 그 마을에 쳐들어와서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아 있다. 그 종은 얻은 땅을 완호평이라 했는데 지금은 잘못 전하여 지량평이라고 한다.
다음은 밀양손씨의 중시조 광리군(廣理君) 손긍훈(兢訓)에 대해서

중시조(中始祖)이신 광리군(廣理君)의 휘(諱)는 긍훈(兢訓)이시다. 긍훈(兢訓) 즉 손대장군께서는 고려 태조(太祖)와 함께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훈공을 세워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 에오르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져서 가세를 크게 일으킨 분이시다.
당시 국운이 기운 신라말에 후백제 견훤(甄萱)왕이 운문산(雲門山)에 지룡산성(地龍山城)을 쌓고 기습부대를 만들어 신라공격을 노리던중 서기 927년에 지룡산성을 출발하여 간월산성(間月山城)의 신라군을 무찌르고, 신라군을 포위하여 신라 55대 경애왕과 왕비를 죽이고 국권을 휘어잡은 후백제 견훤왕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허수아비로 왕위에 올려놓았다. 이에 손대장군은 송도 개성의 고려왕 왕건(王建)을 찾아가 후백제를 공격할 것을 간청해 왕건이 손대장군의 지휘하에 15,000명의 기마병을 주어 후백제군 토벌에 나섰다.
손대장군은 당시 견훤왕을 몰아내고 왕에 올라있던 견훤의 아들 신검(神劒)을 생포하고 후백제군을 정복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고려가 마침내 통일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어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지고 정일품(正一品)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에 오르니 그 명성이 일세에 떨치게 되었으며, 사후(死後) 밀양 춘복동(密陽 春福洞)에 장례하고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에 추증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손대장군의 공훈과 명성이 당대의 으뜸이었으나, 역사에 그 사적(史蹟)이 없어 고을 사람들이 그 공덕을 추모하여 추화산정(推火山頂)에 성황사(城隍祠)를 세워 관(官)으로부터 수물(需物)을 갖추어 향사(享祀) 하였다. 광리군께서는 신라 국권을 회복하기위하여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세운 대작갑사(大鵲岬寺)에서 화랑도의 근본인 세속오계를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전통적인 사상교육을 보위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公은 또 임진왜란 때 밀양에 왜병이 침입함에 손장군과 수천의 신병 환상이 추화산에 나타나 왜병을 쫓았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이필달(李必達)이 많은 군사로 쌍령(雙嶺)에서 분전하고 충주 달천(達川)에서 싸울때 공이 꿈에 나타나 부사 이필달에게 현몽하여 전원 무사히 생환케 하였다고 전해진다
밀양손씨의 족보 편찬 및 명세에 대해서

① 밀양손씨 원계리족보(密陽孫氏 元溪里族譜) 전 2 권으로 1710 진주 원계리(晋州 元溪里)에서 발간하였다. 이명(異名)은 건곤보(乾坤譜)이며 현재와 유사한 족보체계로 편집되어 있으며 외손까지 등재하였다.
② 밀양손씨족보(密陽孫氏族譜) 전 5 권으로 1786년 진주(晋州)에서 발간하였으며. 이명(異名)은 무자보(戊子譜)이다. 전국의 밀양손씨를 둥재하였으며, 현재의 족보체계로 편집되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편제하였다.
③ 밀양손씨세보(密陽孫氏世譜) 전 8권으로 1802년 운봉 실상사(雲峰 實相寺)에서 발간하였다. 이명(異名)은 임술보(壬戌譜)이다.
④ 밀양손씨세보(密陽孫氏世譜) 전 6권이며 1840년 정읍 음성(井邑 陰城) 발간하였다. 이명(異名) 경자보(庚子譜)이다.
⑤ 밀양손씨세보(密陽孫氏世譜) 전 9권으로 1872년 장성(長城)에서 발간하였다. 이명(異名)은 임신보(壬申譜)이다. ⑥ 밀양손씨세보(密陽孫氏世譜) 전 14권으로 1874년 경성(京城)에서 발간하였으며 이명(異名)은 갑술보(甲戌譜)이다.
⑦ 밀양손씨세보(密陽孫氏世譜) 전 10권으로 1890년 진주 원계(晋州 元溪)에서 발간하였다. ⑧ 밀양손씨대동보(密陽孫氏大同譜) 전10권으로 1984년 서울에서 발간하였고 이명(異名)은 갑자대동보(甲子大同譜)이며, 밀양손씨 전국종친회 주관으로 최초의 양장본으로 발간하였다.
⑨ 밀양손씨대동보(密陽孫氏大同譜) 전 22 권으로 2010년 서울 발간하였으며, 이명(異名) 경인보(庚寅譜)이다, (인터넷대동보) 국내 최초로 족보를 인터넷으로 확인이 가능하도록 편제하였다. 누구나 쉽게 볼수있도록 한글과 한자를 병기하였으며, 세계 어느곳에서 족보열람이 가능하며 족보프로그램으로 쉽게 책족보 발간 가능하다.
3. 밀양손씨 옛 족보 현황
가. 밀양손씨 원계리족보 (密陽孫氏 元溪里族譜)의 발간시작은 1695년 을해년에시작하였다, 발간년도 1970년 숙종36년 경인년에 발건되었다. 수량 2책(乾(건)으로 책 78장, 坤(곤)책 69장, 총 147장으롶구성되었다. 크기는 가로 25cm 세로 36.5cm이고 인쇄 목판본으로 편집은 6단으로 편집되었다. 특징으로 경상남도 문화유산 자료로로 지정되어 있다. 18세기 초까지의 밀양 손씨 및 그 외 후손의 계보를 매우 정확하게 담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진주등 남부의 문중을 주로 하나 밀양손씨를 전국적으로 망라하고 있는 대동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의 간행을 주도한 손전(孫佺)의 상세하고도 치밀한 주석이 곳곳에 보임으로써 사실의 기술에 객관성을 인정되고 있다. 자녀를 기술하는 순서가 生年順이 아니라 선남후녀로 시도하였다 특히 외손의 기술에 있어서 사위 이후 3대까지 기록되어있어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는 외손서의 외손서까지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기록문화의 정석으로 비쳐지고 있다.

나. 밀양손씨족보(戊子譜) 는 전체 5책으로 비교적 방대한 자료가 수록되어 있으며 현대의 족보체계와 유사하게 중시로부터 분파된 문중과 지역별로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기록체계도 족보명. 자(字), 호(號), 생년, 벼슬 관직, 졸년, 묘소등 비교적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원계리 족보와는 달리 외손등의 기록은 적으며, 여자 자손의 이름은 기재하지 않고 사위의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배위의 기록은 본관은 물론 배위의 부, 조, 증조, 고조의 성명과 관직까지도 상세하게 기록한 경우가 있다. 이후 발간된 대동보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고 보고를 마쳤으며 많은 박수를 받았다. 우리 종친들도 다시 한번 우리 족부의 우수성을 감지하고 후손들에게 기록문화의 총아로 불리우는 족보가 왜 중요한지를 가르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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