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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효공 손순의 46세 손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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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손홍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6-05-05 12:24 조회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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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문효공 손순의 46세손이다.

 

 

 나는 손씨의 가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문효공은 신라 개국공신으로 문의왕에 추봉된 6부 촌장의 한 사람이자 손씨 성을 하사받은 무산 대수촌장 구례마의 31세후손이다. 시조 문효공 손순 어른은 하늘에서 내린 효자로 효심이 지극히 깊어 통일신라의 흥덕왕으로부터 집 한채와 세급미 50석을 하사받았으며, 6두품 귀족작위를 받아 신라국효(國孝)로 인정받은 훌륭한 분이다. 효의 가치는 나라의 어떤 벼슬보다 더 값지고 귀한 것이며, 단순한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공동체의 기반이 되는 가치이기도 하다.

 우리 가문의 자랑스러운 발자취는 실로 대단하여 후손들에게 어느 성씨 못지않은 자긍심을 갖게 해주고 또한, 삶의 현장에서도 좌표가 되고 있다. 밀양손씨는 손순의 손자 손익감이 공을 세워 응천군에 봉해지면서 밀양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시고 우리밀양 손씨의 가문을 빛낸 수많은 분 중 몇 분을 소개하려고 한다.

 

 

 중시조(中始祖)이신 휘() 긍훈(兢訓)은 문효공(文孝公) 휘 순의 7세손으로 손대장군(孫大將軍)께서는 고려 태조와 함께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훈공(勳功)을 세워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에 올라 그 명성을 크게 떨치었으며,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크게 빛내신 분이다. 공은 추화산성(推火山城)에 거점을 두고 외적 방어에 큰 공을 세웠으며 신라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원광국사가 세운 대작갑사(大鵲岬寺)에서 화랑도의 근본인 세속오계를 귀산(貴山)과 추항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에게 가르쳐 전통적인 사상 교육에도 앞장섰다. 공은 고려 태조 때 도총(都摠)으로 후백제 견훤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웠다.

 

 

 시조 문효공 19세이신 밀성군 휘 빈() ()께서는 문장이 탁월하고 무략이 뛰어나셨으며, 고려 고종 신해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주요직을 두루 거치며 공을 쌓았고, 충렬왕 때에 여진족이 북쪽의 변방을 침범했을 때에는 병부상서 및 정북대장군으로 출정(出征)하여 대 승리를 거두셨다. 그 공적(功績)을 기려 함경도 온성에 전승비가 세워졌다.

 개선 후 돌아와서 이부상서가 되어 출장입상의 영걸(英傑)로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 수문전대학사 동수국사 상장군으로서 사도(司徒)에 승배되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휘 책() ()은 문효공 25세손으로 의주목사 휘 귀린(貴麟)의 장자이고 목사공파의 파조(派祖)이시다.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수주목사(현 부천지역)를 지냈는데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불복하여 참변을 당하셨다. 이성계의 정권찬탈을 보고 그 부당성을 지적하다 이방원에게 피살되어 영원한 충신으로 역사에 남았다.

부인 이씨는 삼형제를 데리고 호남으로 내려왔다. 첫째 검경(儉敬)은 나주에, 둘째 유경(有敬)은 보성에, 셋째 계경(季敬)은 정읍에 각각 정착하여 각 파조가 되었다.

  

 

 충장(忠莊)공 손서륜은 자는 돈중(敦中)이고 아버지는 참봉 손순조(孫順調)이다. 1450(세종 3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단종 즉위 후 집현전박사가 되었는데 세조의 왕위찬탈 후 사직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1457(세조 3) 순흥에 유배 중인 금성대군과 외삼촌인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복위를 기도하고 이 모의에 참여하여 남주 일대에서 격문을 돌리고 의사(義士)를 모집하다가 실패하고 처형되었다. 281년동안 역신(逆臣)으로 낙인찍혀 있다가 1738(영조14) 사면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91(정조15)에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추증 받게 됨으로써 충신(忠臣)의 반열에 올랐 

 

 휘 비장(比長)공은 문효공 29세손이다. 목사공 휘 책의 현손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자()는 영숙(永叔)이고 호()는 입암(笠巖)이다1464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469년 예문관 수찬으로 김종직 등과 15학사의 도상에 들었고 신숙주 등과 세조실록예종실록을 편찬하였다. 1476년 전첨으로 문과 중시에 갑과로 급제, 예문관부제학 참찬이 되어, 간언에 기꺼이 따를 것과 대간의 임기를 연장할 것 등의 내용으로 된 시무4조를 왕에게 건의하였다. 1485년 서거정등과 동국통감을 찬진하고, 이어 공조참의 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예문관부제학에 올랐다.

 

 

 한계공(寒溪公) 휘 홍록(弘祿)은 문효공 32세손으로 목사공 휘 책()7세손으로 목사공 휘 책()7세손으로 부제학 휘 비장(比長)의 종증손(從曾孫)이다1537(중종 32)에 태어나났다. 예안禮安(안동의 옛 지명) 현감을 지냈으며 문한文翰(문장과 문필에 능함)이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해 6월 왜군이 전주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사고와 경기전이 위급하게 되자 물재 안의, 당질 초은 손승경(孫承憬)과 더불어 경기전 사적 339호의 태조 어진과 왕조실록 등을 내장산 용굴암(전라북도 기념물 제130)에 이안하여 수호하였다.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다시 비봉암으로 옮겼다가 아산, 강화, 묘향산으로 옮기는 등 총력을 다 해 수호하는데 공을 세웠다.

의주 행궁(行宮)에서 왕을 알현하고 중흥육책(中興六策)의 시무책(時務策)을 건의하여 왕으로부터 별제(別提)의 벼슬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왜란이 끝난 후 조선왕조는 전주사고 본을 모본 삼아 복본해 춘추관,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사고 등 더 안전한 깊은 곳에 보관해 왔다. 조선실록은 1997년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어떤 역사학자는 "조선 전기 200년 역사의 단절을 막았던 선비들의 업적은 10만 대군을 물리친 공에 버금가는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한림(翰林) 공 홍적(弘績)은 문효공 32세손으로 언성(彦盛) 는 언선(彦善) 도봉(道峰)이다. 목사공 휘 책()7세손이요, 부제학 휘 비장(比長)의 증손(曾孫)이다. 1540년에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었고, 1543년 계묘년 9월에 문과에 급제 승문원 정자(왕명문서 작성기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翰林계열)직을 수행하며 1545 을사년에 승진하여 대교, 응교 겸 춘추관 기사관(사초작성)으로 중앙인물의 의로운 사관이었다나이어린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의 횡포와 비위사실을 사실그대로 기록했다.을사사화 이후 명종 3년에 이기, 윤원형의 모함으로 1548년 무신 2월에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어 1549년 정월 23일 돌아가셨다윤원형의 권력남용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으나 바로 죽이지 못한 이유는 명분이 부족하고 사관은 상징적 존재로 공개처형이 부담이 된 것이다. 사초는 왕도 보지 못하며 수정도 금지되는 신성한 기록이다. 공은 뜻을 굽히지 않고 권력자에게 굴하지 않았으며 사실을 기록하다 정치적으로 희생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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